‘ 좋은 이야기’ 공부 - 아사세왕의 참회
본문
『인도 마갈타국 빔비사라왕은 나이 40이 넘도록 아들이 없어 항상 근심이었다. 어느 날 유명한 관상가가 찾아와 말했다
“히말라야의 한 수도자가 죽으면 대왕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니 그 때까지만 기다리십시오.”
부처님을 믿고 존경하던 왕이건만 빨리 자식을 얻고 싶은 마음에 그 수도자를 찾아가 간청하였다.
“어차피 연세도 높으시고 지금 이 추운 곳에서 계시느니 하루라도 빨리 몸을 바꾸어 태어남이 어떠하오.”
즉 스스로 자살하라고 권유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수도자는 “대왕이시여, 나는 아직 3년을 더 살 수가 있소. 3년이 지난 다음 만납시다.”하였다.
왕은 곧 궁으로 돌아와서는 믿을 만한 신하를 시켜 수도자를 몰래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수도자는 “기어이 이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 아사세는 20살이 넘도록 빔비사라왕을 존경하고 따랐으나, 마음 한쪽에는 아버지에 대한 알 수 없는 불만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히 지하 감옥에서, 20년 전 빔비사라왕의 명을 받고 수도자를 죽인 신하였던 죄수를 보는 순간, 아사세는 부왕이 잔혹하게 느껴지면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의 제자인 데바닷타가 아사세를 꾀어 자신은 부처님을 죽이고 새 부처가 되고 왕자는 아버지를 죽이고 새 왕이 될 것을 제안했다. 부처님을 죽이려는 데바닷타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으나, 아사세는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는 아무도 감옥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부왕을 굶겨 죽게 하였다.
비극의 세월이 흘러간 뒤 아사세왕의 아들이 심한 병이 들어 아사세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자 아사세왕의 어머니가 "부왕도 왕이 어렸을 때 병이 나면 몹시 근심하여 밤잠을 못 주무시고 간호하셨지요.”하며 눈물을 글썽이자, 그제서야 아사세는 모든 걸 뉘우쳤다. 그러나 이후 아사세는 무척 괴로워하며 점점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또 온 몸에 피부병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차츰 곪아 터져 난치병이 되어버렸다. 이에 왕의 주치의이자 부처님의 주치의인 기바가 말했다.
“대왕의 병은 의술로 고칠 수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낫게 해주실 것입니다. 부처님께 가시지요.”
아사세왕은 부왕을 죽인 후로는 부처님의 ‘부’자도 못 꺼내게 하던 차라 망설였으나, 기바의 권유로 부처님을 친견하고는 한없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시작하였다.』
★ 빔비사라왕이 수도자를 죽였습니다. 빨리 죽어 내 자식으로 태어나라고 말입니다. 아들이 자신을 낳아 정성껏 길러준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물려받을 왕좌를 빼앗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살인,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저지른 악업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자식을 얻고 싶은 지나친 욕심에서 빔비사라왕은 기상천외한 악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그 자식이 아버지를 죽인 건 당연한 응보일까요? 죽여 마땅한 일이었다면 괴로워할 것도 참회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수도자가 죽임을 당할 때 원한을 품지 않았더라면, 아들로 태어나 그 아비를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빔비사라왕이 자신의 탐심(貪心)에 속아 수도자를 죽였다면, 아사세는 자신의 잠재된 진심(嗔心)에 속아 아버지를 죽인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고 존경하던 빔비사라왕. 전생에 히말라야에서 도를 닦던 아사세. 인과의 법칙을 모를 리 없건만, 자신의 어리석음에 속아 인과를 뛰어넘지 못하고 인과에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 아들이 아비를 죽인 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죽임을 당할 때 가만두지 않겠다고 원한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노의 독이 아비를 죽이고 자신을 괴롭힌 것입니다. 아사세왕이 흘린 참회의 눈물은 아비를 죽인 죄를 씻는 눈물일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분노의 독을 씻어 내는 눈물일 것입니다.
히말라야 수도자처럼, 내가 갑자기 억울한 일을 당한다면, 원망을 품을까요? 아니면 원망이 올라오는 순간, 즉각 나온 자리(주인공)에 되돌려 놓아버릴까요? 원한을 품고 태어난 아사세처럼 알 수 없는 불만, 분노가 일어난다면? ‘나’가 아직 펄펄 살아 있다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펄펄 살아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죽고 사는 일도 아니건만‘나’에게 맞으면 탐심을 내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진심을 내는 내 마음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수 있다면, 거기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크든 작든, 나오는 대로 어디서 나오는지 ‘바로’ 볼 수 있다면, 탐심이든 진심이든 악업이든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냥 죽은들 누가 죽여서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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